데미안 허스트 -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 후기

감상 요약
명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나타난 불쾌함
데미안 허스트
데미안 허스트, 1965년 6월 영국에서 태어난 현대 예술가
죽음과 부패 안의 다면적인 감정과 차원을 포름알데히드 작품으로 표현해서 일약 스타덤에 오름
현대 예술 작가 중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꼽아도 무방하고, 많은 재산으로 인해 개인 갤러리(영국 뉴포트 갤러리)도 가지고 있다.
기괴하고 도전적인 작품을 주로 내놓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를 혁신자, 선구자라 부르지만, 어떤 이는 상업적이고 돈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장사꾼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전시 후기
데미안 허스트 작품은 이전에 영국에서 본 적이 있다.
뉴포트 갤러리도 가봤고, 그의 작품이 꽤 많은 테이트 모던에도 다녀왔다.
그 때는 이번 현대 미술관에 전시한 작품보다 충격이 덜한 것들만 전시해서 그런지, 아니면 테이트 모던 자체가 현대 예술을 모아 놓은 곳이라 그런지, 크게 동요할 만한 느낌을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충격을 집약해서 모아놓다 보니, 그 감정이 크게 다가왔고 결국 '불쾌함'으로 결론지어졌다.

제일 처음 조우한 작품 데님셔츠(a denim shirt)
데님 셔츠의 철자를 재배열하면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라는 본인의 이름이 나온다.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한, 말장난 같은 작품인 셈
다시 생각해보면, 이 작품부터 그는 과연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에게 예술은 뭘까?

붉은 바퀴로부터의 확장
노인의 빈집에서 수거한 잡동사니로 만든 초기 콜라주 작품이다.
이때의 작품을 보면, 그는 '소멸' 혹은 '죽음'에 대해 좀 더 순수하게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폐허가 되어서 소멸에 처한, 즉 원래의 목적성이 다한 것을 다시 본인만의 리듬으로 재창조한 듯한 작품.
이 작품들은 썩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아름답게 폭발하는, 그것은 소녀, 캘리그라피 괴물 시간과 공간 빨강과 초록 첨벙 고리 안녕 페인팅
길기도 한 작품 이름이다.
그는 의미가 '고정'되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적어도 A라는 의미와 B라는 의미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태, 그것을 바랐던 것 같은 느낌.

이 작품부터 상업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인생은 오르락 내리락, 엎치락 뒤치락이란 말이 우리나라에도 있듯,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온다'는 중력의 법칙에 대한 설명에서 기인한 속담이다.
단순하지만 직관적이고 그렇기에 충격을 주는 작품.
그는 청중의 수준을 완벽히 이해했고, 광범위하게 충격을 줄 방법을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인다.
헤어드라이기는 그 방법에 가장 적절한 재료였을 것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을 섬뜩한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삶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다."
삶과 죽음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다.
하지만, 그가 강박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모든 것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고민했고,
자신의 작품을 보는 모든 이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육신은 죽더라도 그의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 옮겨져 살아 있을 테니까.

"때로는 선을 넘어봐야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선을 넘었다.
시체의 머리와 같이 사진을 찍은 작품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이 있었다.
그가 선을 넘어버린 모습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었다.
속으로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성공'을 확신하는 듯한 인상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불가능성
어쩌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작품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 수조 안에 거대한 상어를 넣은 설치 작품이다.
입을 벌린 상어로 하여금 죽음은 언제나 뒤에 따라온다는 공포와 불안을 주지만,
상어 본인조차도 의도치 않게 박제됨으로써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역설을 준다.
이런 의미조차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기 마련인데, 작가는 '박제'라는 기능을 이용해
의미의 소멸을 늦추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 말고도 '천 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잘린 소모리와 파리 유충, 살충기로 구성된 것이다.
한쪽에서 부화한 파리들이 부패한 소머리를 쫓아가다 살충기에 걸려 죽는
그런 허망함을 나타낸, 그리고 그것이 연속되고 있는 작품.

죄인
작가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남긴 빈 약병과 약 포장재를 약장 안에 채워 넣어 구성한 작품.
그는 이것이 어떤 종교의 재단처럼 보였다고 한다.
여기서 불쾌감이 크게 올라왔다.
'약', '종교', 할머니',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감정선의 벽이 가장 낮은 키워드들의 조합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할머니들을 보면 병원에 계시고, 약을 달고 사시고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시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이런 대중의 모습을 정확하게 캐치했고, 선을 넘어 침투했다.
실제로 꽤 오랫동안 이 작품 앞에서 서 있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의 의도가 성공한 것이다.

재단 앞에 놓인 무수한 상징들처럼.
산에 놓여진 수많은 돌처럼.
예수라는 신을 섬기며, 포도주를 마시고 무교병을 먹는 것처럼,
우리는 과학이라는 신을 떠받들고, 약물을 복용한다.
이외에도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인간 두개골 작품과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라는 수천 마리 날개 나비들로 만든 작품이 있었으나,
앞의 작품들만큼 충격적이지 않고 오히려 상업적인 기분만 느껴졌다.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스탠스에 질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듯.
이 전시가 불쾌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관객이다.
관객의 유형은 다양했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나무를 보듯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
어떤 깊은 감정을 느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 두 부류의 모습에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다.
불쾌했던 건, 작품과 같이 셀카를 찍는 사람들.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값을 지불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즐겁게 작품을 관람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죽음'과 같이 웃으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아무리 작품이라지만, 불쾌감과 혐오감 등의 감정이 올라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행위가 일어날 것이란 걸 작가는 예상했을 것이고 그런 행위를 보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란 것. 그리고, 나같은 사람이 역하거나 기타 다른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 것도 다 예측했을 것이다.
의도대로 놀아난 기분이 들어 너무 불쾌하고 찝찝한 전시였다.
오랫동안 그가 선사한 감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데미안 허스트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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